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회선 사건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차오쿤의 당선에 활약했던 우징롄은 너무 큰 공을 세워 차오쿤의 측근들의 경계를 받았기 때문에 민헌동지회 내부에 우징롄을 배척하기 위한 헌정당이 조직되어 실권하고 [[톈진]]으로 떠나야 했다. 1922년 [[영풍함 사건]]과 구국회 회복 이후 사실상 호법운동을 포기하고 있던 쑨원은 이 회선 사건 이후로 호법운동에 완전히 희망을 잃고 혁명정부를 선포, 북벌을 통해 혁명을 진행하게 되었고 중국 내부의 혁명을 위해 중국 내부에서 합작 상대를 찾던 [[중국 공산당]]과 [[1차 국공합작]]을 결정하게 된다. 회선은 중국의 지식인계로 하여금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완전히 잃게 만들었으며 기존 중화민국의 법통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. 이 때문에 중국 국민당은 북벌을 통해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. 이는 직예군벌을 비롯한 다른 군벌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돤치루이는 임시대총통이라는 호칭 대신 임시집정을 택하면서 새로운 법통을 조직할 의지를 천명했고 이후 [[선후회의]] 개최를 통해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냈다. 한편 차오쿤의 총통 당선은 직예군벌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여 보정파와 낙양파의 분열이 가속화되었으며 절강독군 루융샹 등 반직 세력들은 회선 사건을 구실로 차오쿤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반직 세력을 결집하였다. 결국 1924년 루융샹과 치셰위안, [[쑨촨팡]] 사이의 [[강절전쟁]]이 발발하였고 이를 빌미로 북방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던 [[장쭤린]]이 개입하여 [[2차 직봉전쟁]]이 발발, 직예군벌이 몰락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